일회용 청년
누가 그들을 쓰레기로 만드는가
이 책은 영어권을 대표하는 교육학자 헨리 지루의 일회용 청년: 인종화된 기억, 잔혹성의 문화를 번역한 것이다. 원인과 결과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저자가 심층적으로 분석한 미국의 청년 문제는 한국청년 문제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여 책 속 미국을 한국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해 보였다. 저자는 오늘날 청년들이 맞닥뜨린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을 신자유주의(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비판하고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이론)로 꼽았다.
사회는 청년의 정체성을 소비자로 조직하고 그들의 모든 자율적 공간을 사실상 말소하고 있어서 청년들은 시장이 선호하는 가치와 욕망, 욕구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상실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전 세계 청년위기를 풍부하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원인을 복합적으로 진단하였다.
청년들에 대한 전쟁은 신자유주의의 부상 때문인데, 그것은 투기적 자본의 지배, 사회복지의 후퇴, 공권력 위주의 징벌국가, 권위주의의 강화와 민주주의의 쇠퇴, 소비주의의 확산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은 집합적 투자가 필요한 미래의 활력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미래 세대를 포기하는 사회에서 청년들은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는 일회용 노동자가 되거나, 감옥산업과 의료산업을 먹여 살리는 잠재적 범죄자와 심신이 병든 쓰레기가 되고 가고 있으면서 이렇게 만들어 진 쓰레기를 먹으면서 신자유주의 체제는 생존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이런 미국의 상황이 우리의 미래라고 믿고 싶지 않지만, 제국주의 전쟁을 예외로 한다면 저자의 주장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점이 적지 않다.
한국사회 학교기관을 보면 청년들의 이성의 성장을 마비시키고 있다. 서열주의, 학벌주의, 성공주의 안에 숨어 있는 차별을 개인의 노력의 차이와 인간의 본질로 끓임 없이 규정한다. 이를 위해 평가받기를 강요한다. 강요된 평가에 교육적 접근은 없다. 서열을 매기는 일뿐이다. 서열을 좁히기 위한 행정적 재정적 지원은 있는가? 없다. 그냥 그것뿐이다. 알아서 경쟁하라는 것인데 경쟁에서 도태된 자는 어떻게 되는가? 바로 이지점 도태된 상태를 사회적처벌(2015년 초중고생 2만5천명이 부적응으로 학업을 중단함)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물리적 통제와 처벌이다. 학교폭력 생활기록부기제 문제를 보자. 학교마다 학교폭력위원회가 구성되고 경찰에게 신고체계가 확립되더니 이제는 학교 전담경찰관 현수막이 학교 근처에 걸려 있다. 여차하면 학교사회복지사가 학교에 배치되는 것처럼 배움터 지킴이 대신에 경찰이 상주하는 일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물결 속 사회는 끝이 없는 경쟁을 강요했고, 청춘의 낭만이 가득했던 대학은 학력공장이 되어버렸다. 경쟁과 처벌의 사회에서 지금의 청춘들에게 애국은 떠나간 가치이며, 민주주의는 공허한 이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경쟁에서 벗어나 처벌의 두려움 없이 살아가고 싶을 것이다. 사실 청년들이 스펙을 쌓고 안정적인 부품이 되고 싶은 것은 꿈이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생존문제가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지금, 청년들에게 애국과 민주주의 그리고 꿈은 머나먼 이야기다. 바코드 달린 상품이 아닌 요즘의 감각을 느끼고 싶은 게 요즘 애 청년들의 꿈을 것이다.
일회용 청년 문제의 최소한의 대비책은 일상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비판적 교육, 즉 페다고지(아동을 안내한다) 속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일상에서 채득하는 개인적인 경험은 비판적 언어와 이론 실천과 같은 성찰적 행동적 계기를 만날 때 비로소 일관성을 획득하고 집합적인 새로운 주체성과 창조적 활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와 가정을 넘어서 일상생활의 수많은 영영에서 청년에 대한 비판적 교육이 절실하다.
일상적인 비판교육은 청년 당사자의 사적 문제를 구조적인 사회문제와 연결함으로써 개인과 집단의 사회 참여를 가져와야 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을 옥죄는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순적인 분노와 동원을 넘어 새로운 대안을 마름질할 것이다.